박도윤은 샤워도 하지 않은 채 훈련복 바람으로 탈의실 구석에 앉아 있다. 연맹에서 온 공문을 벌써 세 번 읽었다.
재민아. 나 공문 받았어. 연맹에서.
형? 무슨 공문이요
충청권 씨름 리그... 이번 시즌 끝나고 해체 예정이래.
네?
해체요? 리그 자체가요??
응.
ㅋㅋㅋㅋㅋ 아니
ㅋㅋ 아니 이게 진짜예요?? 형 지금 장난치는 거죠?
장난 아냐.
...
예산이요?
어. 충청도청 지원금이 끊기고 타이틀 스폰서도 계약 안 한다고.
씨... 그럼 우리는요
형 우리 어떻게 되는 거예요
리그가 없으면 선수도 없는 거지.
...
형은 언제 받았어요 공문
오늘 오후 두 시.
그럼 2시간 동안 혼자 알고 있었어요???
어.
형 왜 바로 전화 안 했어요
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.
관장님은요. 관장님도 아세요?
아직.
형.
알아. 말씀 드려야지.
근데 관장님이 이걸 들으시면... 뭔가 더 무너지실 것 같아서.
...
저 지금 손이 진짜 떨려요.
나도.
20분 후
형. 이거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 되잖아요.
공개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? sns에 올리든 기자한테 알리든
씨름이 국기잖아요. 이게 말이 돼요, 이게?
...생각해봤어.
생각해봤으면 뭔가 결론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
수진 씨한테 연락해볼까 싶어.
기자 수진 씨요? 작년에 우리 취재한?
응. 씨름 쪽 사정 제일 잘 아는 기자잖아. 일단 같이 얘기해보자.
오케이. 형이 결정하면 저도 따를게요.
박도윤이 채팅방에 김수진을 추가한다.
도윤 선수님? 오랜만이에요, 갑자기 어쩐 일이에요?
수진 기자님 안녕하세요 이재민입니다
재민 선수님도! 두 분이 같이 연락을 다 하시네요.
네, 사실 오늘 연맹 공문을 받아서요.
충청권 씨름 리그가 이번 시즌 종료 후 해체된다고 합니다.
...네?
잠깐만요.
공식 문서로요?
예.
아.
아...
기자님도 놀라시죠.
작년에 취재할 때부터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. 근데 막상 이렇게 되니까.
두 분 지금 어떠세요?
솔직히 안 괜찮아요. 기자님, 이거 기사 쓸 수 있어요? 여론이 바뀔 수도 있잖아요.
쓸 수 있어요.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.
근데 그 전에 두 분이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하셔야 해요. 기사는 그 다음 문제예요.
맞아요.
형은요? 이제 솔직하게 얘기해봐요.
...사실 나 한 가지 더 있어.
뭐요?
지난달에 서울 중학교에서 연락이 왔어. 씨름 방과후 강사 자리.
...아.
형 그거 받을 거예요?
아직 답 안 했어.
근데 그게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에요.
...우리가 공개적으로 싸우면 연맹이랑 척 지는 거잖아. 그 학교는 연맹 추천으로 연락 온 거거든.
...
아.
아, 그래서 형이 "생각 중"이었던 거예요.
미안. 처음부터 말했어야 했는데.
도윤 선수님.
예.
38살에 다음 길을 생각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. 이해해요.
근데 지금 저한테 이 얘기를 꺼낸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죠?
...알아요.
형.
형이 그 자리 포기하면서까지 싸워야 한다는 말은 안 할게요.
근데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. 몰랐거든요, 형한테 그런 선택지가 있는 줄.
재민아.
네.
형이 서울 가면 관장님은 어떻게 돼.
...
그게 제일 무서워.
경기장 모래판이에요. 지금 여기 서 있어요.
여기서 26년을 뒹굴었는데.
열두 살 때 관장님이 처음 데려온 날. 11월이었어. 모래가 얼마나 차갑던지.
넘어지고 일어서고 또 넘어지고. 관장님은 계속 "다시"라고만 하셨어.
26년 내내 "다시"였어.
근데 이번엔 "다시"가 없는 거잖아.
형. 저 지금 갈게요. 거기 같이 있을게요.
안 와도 돼.
아니 진짜 갈 거예요.
재민아.
나 이의 신청 할게.
형!!
서울 자리는... 나중에 생각하자.
형 진짜요??
응.
도윤 선수님. 이의 신청 하시면 제가 기사 쓸게요. 전국판으로. 혼자 싸우는 거 아니에요.
고마워요, 수진 씨.
근데 그 전에 제가 먼저 해야 할 게 있어요.
관장님이요?
응.
저도 같이 전화할게요, 형.
아니. 이건 내가 해야 해.
26년 전에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분이잖아.
수진 씨, 재민아... 고마워. 둘 다. 사실 오늘 공문 받고 나서 제일 무서웠던 게 이거거든. 이걸 말할 사람이 없다는 게. 씨름판이 좁아질수록 주변이 다 없어지니까... 뭐, 어. 근데 너희가 있어서.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아.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어. 이의 신청이 안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. 근데 그냥 모래판에 혼자 쓰러지는 것보다는... 같이 나가 떨어지는 게 낫잖아.
❤️
형 ㅠㅠ 아 진짜
기다릴게요.
관장님한테 전화 드렸어.
뭐라고 하셨어요?
한참 아무 말씀 안 하셨어.
그러더니 한 마디 하셨어.
뭐라고요?
"다시."
ㅠㅠㅠㅠㅠ 형
저 지금 훈련복 입고 울고 있어요
저도요. (기자 맞나...)
ㅋ
오랜만이다, 이 느낌.
무슨 느낌이요?
질 것 같은데 나가는 느낌.
씨름이 원래 그런 거잖아.