야 서윤아
지금 학술지 사이트에서 이상한 거 봤어
논문 쓰는 중인데. 뭔데
《사회과학연구》 이번 최신호
최민재 선배 논문 제목이
"청년 세대의 수동적 과시 소비와 온라인 자아 연출 전략"
...?
그게 내 논문이야
잠깐
뭐?
내가 작년 10월에 선배한테 초고 보냈거든. 검토해달라고.
그 이후로 연락이 한 번도 없었어. 6개월 동안.
그리고 오늘 학술지에서 봤어.
내 이름은 없고.
...
야 준호야
확실한 거지?
1절 3문단. 거기 내가 만든 개념이 있어. '수동적 과시'를 정의하는 방식인데 내가 직접 프레임 잡은 거야. 아무도 그렇게 쓴 사람 없어.
그리고 2절 인터뷰 코딩 체계. 변수 이름까지 내 초고랑 완전히 똑같아.
'의도적 비과시', '수동적 노출', '수치화된 인정 욕구'
이거 내가 만든 용어야
ㅅㅂ
응
진짜로?
응. 진짜로.
그 선배... 지금 뭔 짓을 한 거야
모르겠어
믿기지가 않아서
계속 다시 읽고 있어
증거 있어? 파일이나 이메일
드라이브에 초고 있고, 선배한테 보낸 이메일도 있어. 날짜 다 찍혀 있고.
지금 백업하고 있어
책상 위에 놓인 외장 하드드라이브
클라우드에도 올리고 있어
잘했다 그건
근데 준호야
응
선배한테 연락 왔어? 논문 나왔다고
아니. 아무것도.
6개월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냥 냈어.
그거 더 섬뜩하다
나도 그 생각 했어. 실수나 착각이 아니라는 거잖아.
맞아. 실수면 먼저 얘기했겠지.
서윤아 근데
이거 신고하면 나 어떻게 되는 거야
솔직히 말해?
응
증거가 분명하면 네가 이길 수 있어. 근데 지도교수님이 선배 편 들면 한 학기는 진짜 개힘들 수 있어.
그게 문제야. 내 장학금 갱신이 이번 학기 심사 중이거든.
선배가 지도교수님이랑 너무 친해.
아...
그냥 넘어가야 할 수도 있나 싶다가도
그러면 더 미칠 것 같아
넘어가긴요.
그 논문 인쇄본 나오면 그냥 선배 업적으로 굳어지는 거잖아. 영원히.
알아...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잠을 못 자는 거잖아
인쇄 마감 언제야
이번 주 금요일. 오늘이 화요일이니까 사흘 남았어.
사흘.
오케이. 저널 편집부에 먼저 연락하는 거야. 학과 신고 전에.
편집부?
응. 저작권 문제 제보하면 인쇄 보류 걸 수 있어. 학술지는 표절 의혹 들어오면 절차상 홀드해야 해.
그러면 선배는
선배는 그때 가서 해명하면 되지.
지도교수님은
일단 편집부 답장 받은 다음에 같이 생각하자.
알겠어.
...서윤아
이 카톡방에 선배 추가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
왜?
직접 묻고 싶어서. 기록 남기게.
대면하면 내가 흔들릴 것 같거든. 근데 문자는 다르잖아.
선배가 뭐라고 하든 여기 다 남으니까.
야 그거 스마트한 생각인데
근데 그냥 씹으면?
씹어도 기록은 남잖아.
...그렇네.
해.
응.
이준호는 몇 초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, 최민재를 채팅방에 초대했다.
선배, 안 주무시면 잠깐만요.
읽음 표시가 뜨는 데 4분이 걸렸다.
어 준호야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
《사회과학연구》 이번 호 보셨죠?
응, 거기 내 논문 실렸지 😊 왜, 봤어?
네. 읽었어요.
선배.
1절 3문단 '수동적 과시' 개념 프레이밍이랑, 2절 인터뷰 코딩 카테고리요.
제가 작년 10월 14일에 선배 이메일로 보낸 초고에 다 있는 내용이에요.
...
준호야, 무슨 말 하려는 건지 모르겠는데
파일명이 "수동적_과시_소비_초고_v3.docx"예요. 그때 선배한테 검토 부탁드렸고요.
코딩 카테고리 이름까지 제 초고랑 동일해요.
그건 내가 그 자료를 바탕으로 발전시킨 거야. 네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서 내 연구로 이어간 건데. 학문이 원래 그렇게 발전하는 거 아닌가
선배님
어, 서윤이도 있었네
네 안녕하세요 😊
"영감을 받아서"가 코딩 변수 이름까지 그대로 나오진 않잖아요.
서윤아, 이건 연구자들 사이에서 학문적 영향 관계라는 게 있어. 그 복잡성을 이해하기엔
복잡한 거 없어요.
저자 표시 없이 다른 사람 초고에서 핵심 개념 그대로 쓰면 표절이에요.
표절이라는 단어를 이렇게 가볍게 써도 되나
선배.
이메일 발송 기록이랑 드라이브 파일 수정 날짜 다 있어요.
초고 작성일이 2023년 10월 14일이고, 선배한테 발송된 기록도 있어요.
저널 인쇄 마감이 이번 금요일인 거 알고요.
편집부에 연락하기 전에 먼저 말씀드리는 게 맞다고 생각해서요.
최민재는 3분 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. 읽음 표시는 켜진 채로.
...
준호야.
솔직히 말할게.
그 초고 보고 아이디어가 너무 좋아서... 내가 선을 넘었어.
근데 이미 제출된 거야. 지금 인쇄 멈추면 나 어떻게 되는지 알아? 이 논문으로 연구재단 과제 신청해놨어. 이게 문제 되면 학과 전체에 영향이 가.
그게 지금 핵심이에요?
서윤아, 나 망하는 거야 그러면
선배.
저도 무서워요. 장학금 심사 중인 거 아시잖아요.
근데 그게 이걸 넘어가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어요.
준호야 잠깐만. 공동저자로 네 이름 넣어달라고 편집부에 요청할게. 지금이라도. 그러면 되잖아.
와.
지금 뭐라고 하신 거예요.
서로한테 좋은 방향을 찾자는 거잖아
공동저자요.
제가 단독으로 쓴 논문에.
...
선배, 저 편집부에 연락할게요.
야 준호야 잠깐
이러면 지도교수님한테도 다 알려지는 거야. 네 앞길도
선배가 먼저 선을 넘으셨잖아요.
저 알아요. 이러면 저도 힘들어질 수 있다는 거.
그래도 제가 1년 반 동안 쓴 논문이에요.
최민재의 메시지 이후로 읽음 표시만 켜진 채 아무 답장이 없었다.
야 준호야
응
방금 한 거 잘한 거야.
어떻게 될지 진짜 모르겠어.
그래도 기록 남았어. 선배가 "선을 넘었다"고 인정했잖아.
응. 캡처해놨어.
😮
역시
편집부 이메일 지금 쓸게. 같이 봐줄 수 있어?
당연하지. 써봐.
서윤아, 잠깐... 이메일 초안 쓰다가 손이 좀 떨려서. 그냥 그거 알아줬으면 해서. 무섭긴 한데, 그래도 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. 어, 고마워. 진짜로.
떨려도 돼.
오늘 진짜 용감했어.
용감한 건지 그냥 무모한 건지
둘 다일 수 있지.
그래도 해야 할 건 한 거잖아.
응.
이메일 다 썼어. 보낼게.
보내.
보냈다.
오케이.
이제 자.
잠이 올지 모르겠지만.
몰라. 근데 해야 할 건 했잖아.
맞아.
...서윤아
왜
고마워.
에이 뭘.
야 근데 진짜 마지막으로 하나만
응?
그 선배 논문에 '수동적 과시' 개념 있잖아
응
오늘 밤 그 선배가 딱 그짓 한 거 아니야
자기 것도 아닌 걸 자기 것처럼 드러내려고 한
ㅋㅋㅋㅋㅋ
야 이 상황에 그게 웃겨
ㅋㅋㅋㅋ 어쩔 수 없잖아
ㅋㅋ 진짜 그렇네
자야겠다. 내일 보자.
응 잘 자.
편집부 답장 오면 바로 알려줘.
응. 꼭.